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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데몰리션]영혼을 찾는 한 남자의 여정

by Amazing Jerry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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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몰리션(Demolition)
데몰리션(Demolition)

개봉/장르/감독/출연진

개봉: 2016.07.13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장르: 드라마

국가: 미국

러닝타임: 100분

감독: 장 마크 발레/Jean Marc Valle

출연: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al(데이비스 역), 나오미 왓츠/Naomi Watts(캐런 역)

Who is next Brad? It is...

'제이크 질렌할'이 위 질문에 대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감독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1세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하였다.

내가 '제이크'를 기억 하는 건 2004년 개봉작 '투모로우(Tomorrow)부터이다.

이때부터 '제이크'가 출연한 영화는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후 애틋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브로백마운틴(Brokeback Mountain)', 범죄 스릴러 '조디악(Zodiac)' 과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 SF영화인 '소스코드(Source Code)', 그리고 리뷰를 쓰고 있는 '데몰리션(Demolition)을 본 이후, 이 배우가 정말 좋아졌다.

특히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에서 보여준 사이코패스(Psychopath)연기가 압권이었는데, 특히 배역을 위해 10kg가까이 감량해 푹 패인 눈매에서 나오는 안광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흥행에서 실패하였지만 '데몰리션'에서 보여 줬던 상실감과 공허함을 표현해내는 그의 연기는 극 중 '데이비스'의 아픔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훌륭한 외모와 매력적인 얼굴 그리고 연기력까지 갖춘 '제이크'는 다양한 역활을 본인의 캐릭터로 만드는 그의 능력은 슈퍼 히어로 장르인 '스파이더맨:파 프롬 홈(SPIDER-MAN:FAR FROM HOME)에서는 이중적 성격의 '미스테리오(Mysterio)'도 완벽히 소화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양한 장르에서 꾸준하게 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쌓아가는 중이며, 건장한 체격과 남자다운 얼굴선을 가진 동시에 깊으면서도 아이와 같은 눈빛을 가진 '제이크'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브래드 피트(Brad Pitt)'와 많이 닮아 보인다.

많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와 꾸준함으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브래드 피트'처럼 '제이크'도 많은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연기하는 그를 기대한다.

그는 부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처음 '데이비스'의 행동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쉽게 그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은 나 뿐이었을까?

'데이비스'는 교통사고로 부인을 잃은 남편의 일반적인 행동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억지로 울어 보려고도 하지만 울 수 없었고, 위로해주려는 가족들에게도 등을 돌리고 도움을 거절한다.

본인 스스로 계속해서 아내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오직 자신 주위의 사소한 물건부터 가족 관계까지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다.

'데이비스'는 왜 이러는 걸까?

정신학(psychiatry)적으로 볼 때 파괴적 행동은 자신이 무엇인가에 압도됨을 느낄 때 대체 기재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자해와 파괴적 행동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하는데 엄밀히 자해는 파괴적 행동의 극단적인 형태에 속한다.)

파괴적 행동의 한 형태로 자신을 억누르는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 되었을 때 그것이 업무이든 사람 간의 관계이든 간에 '태업(Sabotage)'하려 드는 경향을 보이는데 자신에게 스트레스(Stress)를 주는 대상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감이 못한 거짓이라 생각해 상대방이 먼저 '나'를 버려주고, 포기해 주길 바라는데, 이렇게 무능하고 결여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신을 억누르는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데이비스'는 아내를 잃기 전까지 매우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고, 그의 삶에 주체는 따로 있었다.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도 아내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고, 장인어른(Father in raw)이 설립한 회사에서 27살부터 일하며, 남들이 원하는 남편이자, 사위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데이비스'가 극 중 대사 중에 '원숭이 몸단장'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잘 꾸며진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데이비스'의 삶에 균열이 생긴 건 아내의 죽음이었고, 상실감과 스트레스는 자신을 억누르게 되었다. 결국 이 원인은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야생의 동물들이 상처를 입게 되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듯이, '데이비스'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아닐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사랑한 적은 있었는지? 와 같은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역설적이지만 지금의 자신을 완벽하게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Demolition man

데몰리션(Demolition)- 파괴, 폭파. 이것이 제목인 이 영화는 영화의 주인공인 '데이비스'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파괴한 후에야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데이비스'는 사라들이 보기에 잘나가는 금융투자 회사의 직원이고, 회사 설립자의 딸과 결혼해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사는 듯하다.

'데이비스' 자신도 이런 삶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자기 삶에 변화가 생기게 됨을 느낀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쳤던 사소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삶의 주체를 잃은 자기 자신도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결혼 한 것도 아내가 쉽게 다가와 주었기 때문이며, 지금 일하는 금융투자 회사도 아내와 결혼한 이유로 27살 때부터 장인 밑에서 일을 시작한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일 원하는 삶인지, 좋아서 하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오고 있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는 '데이비스'는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나 동료는 없어 보인다.

그러다 문득 자기 돈을 먹은 자판기를 떠올렸다. 자신의 답답함을 하소연할 일방적인 통로로 자판기 회사를 선택 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에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 편지를 왜 써야 하는지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것일까?

장인어른이 예전에 자신에게 해주었던 충고에 따라 그는 고장 난 것을 고치기 위해 고장 난 모든 것을 분해하기 결심했고, 자판기 회사에 보내는 편지에 자신을 두르고 있던 허울들, 위선들을 포함해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자신을 분해한 내용을 몇 통의 편지에 써서 보냈고, 고쳐진 순수한 자신만이 남기를 바랬던 것 같다.

'데이비스'가 보낸 편지를 읽게 된 자판기 회사 직원 '캐런'은 '데이비스'에게 묘한 연민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정신적으로 서로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준다.

'데이비스'는 '캐런'과 그녀의 아들 '크리스'와 감정의 교류를 통해 아픔을 위로받았고, 그런 과정에서 잊고 지낸 본래의 자신을 기억해내고 점차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가게 된다.

아내에 대한 자신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를 느끼며, 떠난 아내의 자취를 쫓게 되었다.

영화 초반에 습관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은, 마치 고장 난 기계에 오류 표시가 뜨듯 자신도 망가져 있었단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자신의 무심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결국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영화 초반에는 '데이비스'를 길들이려는 의미를 담은 부정적 느낌의 '원숭이 몸단장'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는 '데이비스'가 가족의 소중함과 포근함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제 서야 '데이비스'가 정상 작동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듯했다.

힘든 자아 찾기 여정 끝에 무례하게 굴었던 장인어른에게 용서를 구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사랑했던 아내를 위해 준비한 것을 장인어른에게 함께 해 달라고 부탁 함으로써 분해 되었던 모든 것은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데이비스'는 현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자신이 주체가 되지도 못하고, 원하는 것을 하지도 못하고, 수치화되고 계량화된 채로 살아가는 우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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